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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생애, 사상과 영향

by 응지팍 2023. 3. 15.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Socrates, 기원전 470년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일생을 철학의 제 문제에 관한 토론으로 일관한 서양 철학에서 첫 번째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은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 등에 의해 '신성 모독죄 '젊은 세대들을 타락시킨 죄' 로 기소당하고 기원전 399년에 71세의 나이로 사약을 마시고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1. 생애

플라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석공소를 운영한 석공이자 조각가였던 소프로니코스를 아버지로, 산파였던 파이나레테를 어머니로 하는 아테네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장 초기에는 직업을 세습하던 당시 문화에 따라 아버지 밑에서 석공 기술을 배우며 철학, 기하학, 천문학 등을 공부했고, 청년에서 40세까지 세 번에 걸친 전쟁에 중장보병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40세 이후에는 교육자로 청년들의 교화에 힘썼습니다. 기원전 406년, 500명 공회의 원로 일원이 되어 1년간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연 철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테네의 몰락기였으므로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정신과 진보주의 정신과 반하여 개인주의적이며 비판적 정신이 대립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도 이러한 경향을 지니게 되었으나 당시의 궤변으로 진리를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를 찾아서 이상주의적, 목적론적인 철학을 수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정의·절제·용기·경건 등을 가르쳐 많은 청년에게 큰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러나 공포정치 시대의 참주였던 크리티아스 등의 출현이 그의 영향 때문이라는 오해받게 되어 '청년을 부패시키고 국가의 여러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죄명으로 고소되고, 배심원들의 투표 결과 40표로 사형이 언급되었습니다. 그는 도주할 수도 있었으나 태연히 독배를 들어 마시면서 자신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자신 대신 갚아 달라고 친구에게 당부하였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 그의 신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은 닭을 대가로 바쳐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참고로, 흔히 소크라테스라 하면 악법도 법이라며 담담히 사약을 받아들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가 후에 변질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하나인, 에우렐이 말년에 작성한 파타모닐리아에 묘사한 내용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사약을 몇 번이고 뒤엎어서 결국 마지막에 간수장이 간수들을 시켜 억지로 사약을 먹여 최후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2. 사상

소크라테스는 아무런 저서도 남긴 바가 없어, 확실한 사상을 알기는 어려우나, 플라톤의 저서 등에 언급된 것을 보면 델피의 신탁에서 "만인 중에 소크라테스가 제일 현명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무지를 자처하던 소크라테스는 신의 신탁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의아심을 품고 여러 현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사람도 자기 말을 확실히 알고 언표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에 맞서, 인간으로서의 아레테, 즉 덕을 발휘하려면 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방법으로 제논의 변증법을 활용하여 논변을 진행하는 사이에 잘못된 판단의 모순을 깨우치고 다시금 바른 판단으로 유도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산파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의견이 무지에 기인한 의견 또는 그에 준하는 단견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 가지 지식을 알지 않는 한 단편의 의견으로 토론을 중지시켜서 '앎의 변증'을 멈추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질문에서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끝없이 질문했으며,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진리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덕이 내재한다고 믿고 사람들에게 이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무지함을 일깨워 주고 용기나 정의 등에 관한 설교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대화를 통해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고 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때문에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해 사약을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탁월한 지적·도덕적 성격에 의해 비단 철학자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감화시켜 '인류 최대의 교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편 그는 합리주의자였으나, 때로는 초 경험적인 내심의 소리, 즉 다이몬의 소리를 경청하고, 때로는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다이몬은 고대 신비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찾았던 의식의 바탕이 되는 일종의 심연의 의식입니다. 불가의 참나, 도교의 원신 등과 일맥상통합니다. 다이몬이 영어로 데몬이 되었고, 이것은 악마를 뜻하게 됐습니다.)

3. 영향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져 메가라 학파, 키니코스 학파, 키레네 학파 등을 이루고, 특히 수제자인 플라톤의 관념주의로서 피어나, 그 후의 서양 철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기독교 수도원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통해 아무런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또한 문학적 흥미도 지닌 바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철학의 방법으로 취한 대화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걸작 대화집들을 낳았습니다. 또한 그의 독창적 개성과 비극적인 죽음은 전기문학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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